창38장 12~30절 "유다와 다말"/ 찬191장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0 ratings
· 63 viewsNotes
Transcript
오늘 본문은 야곱의 열두 아들 중 하나인 유다의 가정 이야기입니다. 등장인물은 유다와 다말인데, 겉으로 보면 시아버지와 며느리의 불륜이라는 매우 기이한 사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앞장(37장)까지 야곱 가문 전체에 중요한 요셉 이야기를 한창 하고 있는 중인데 왜 이 내용이 여기 들어와 있는지 성경의 의도를 헤아리며 오늘 우리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할 수 있기 바랍니다.
본문의 배경
유다 집안은 얼마 전 장자와 차자가 연달아 죽어 매우 두렵고 불안한 분위기 속에 있습니다. 맏아들 엘은 자신의 악함 때문에 하나님의 징벌을 받아 죽었습니다
창38:7 “유다의 장자 엘이 여호와가 보시기에 악하므로 여호와께서 그를 죽이신지라”
유다는 당시의 수혼제 관습대로 둘째 아들 오난에게 형수를 취하여 자식을 낳아주라고 명합니다. 이 제도는 후에 율법(신 25장)에도 명시되듯이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남성의 역할이 절대적인 시대에 가장인 남편이 자식 없이 죽었을 경우 그 집안이 소멸되지 않도록하며 미망인이 생활해나갈 수 있도록 배려하기 위한 선한 제도입니다.
그런데 둘째 아들 오난은 형수가 자식을 얻는 것이 자기에게는 이익 될 것이 없다는 계산적 판단에서 형수와 잠자리를 하긴 하지만 자식을 낳게 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은 가족공동체를 돌보지 않고 자기 자신의 이익만을 생각하는 오난의 악한 마음도 징벌하셔서 그를 죽이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유다의 가정에 이례적으로 적극적으로 개입하신다는 느낌을 갖게 됩니다. 유다의 가정에 심상치 않은 섭리가 있을 것 같습니다. / 오늘 본문 12절 부터 함께 이러한 관점으로 보도록 하겠습니다.
영적 분별이 없는 유다
계속 아들을 잃을까 두려워진 유다는 수혼법에 따르면 셋째 아들 셀라를 주어야 하지만 아직 어리다는 이유로 주지 않고 다말을 친정으로 보내서 기다리도록 합니다. 주목해야 할 것은 이때 유다는 이들들이 하나님의 징벌로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원인을 영적인 차원에서 통찰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두 아들의 연속적인 죽음의 원인이 하나님 앞에서의 죄 때문임을 깨닫고 회개하며 가장으로서 집안의 죄를 속하는 길로 나아가야 할 터인데,그는 막연히 두려워하며 이런 상황이 마치 며느리 탓인 양 여깁니다. 그래서 셀라가 장성해도 시침 떼고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습니다.
창38:12 “얼마 후에 유다의 아내 수아의 딸이 죽은지라 유다가 위로를 받은 후에 그의 친구 아둘람 사람 히라와 함께 딤나로 올라가서 자기의 양털 깎는 자에게 이르렀더니”
얼마 후에 라는 표현이 단지 시간의 흐름처럼 느껴지지만. 원어적 의미를 보면 많은 시간이 지난 후에라는 의미입니다. 많은 시간이 지났음에도 유다는 하나님께로도 향하지 않고 아내가 죽은 이후 대를 이어갈 모습조차 갖지 않는 상황으로 성경은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와 반대로
다말은 수혼법을 통해 자기 집안을 세워나갈 수 있는데,자신의 권리를 찾지 못하고 청상과부로 친정에 더부살이하는 딱한 처지가 되었습니다 따져보면 자기가 유다 집안의 며느리가 된 것은 유다의 선택이었고(창 38:6),아들 둘이 죽은 것도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 악을 행한 결과로 다말의 책임이 아니건만 부당한 대우를 당하고 있으니 억울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다말의 일탈
이런 상황에서 다말은 행동을 시작합니다 그것은 일탈적이지만 매우 용기 있는 행동이었습니다. 다말은 독신이 된 시아버지 유다의 동선을 살피고 그가 양털을 수확하러 딤나로 간다는 사실을 파악합니다. 그가 지나갈 길목에서 변장을 하고 기다립니다. 유다는 다말의 계략에 걸려들어 다말과 관계를 맺습니다. 이때 다말은 임신할 경우 자기가 관계한 사람이 유다라는 사실을 증명할 물품을 확보합니다. 예상대로 다말이 임신하자 유다는 친정에 보냈던 다말을 끌어와 화형에 처하려 합니다 이왕 친정에 돌려보내고 속마음에 다시 부르지 않으려했 던 며느리인데도 불구하고 모른 척하지 않고 구태여 끌어와 사형을 시키는 것은 앞서 창피당하지 않으려 담보물을 포기한 것에서도 보듯이,유다가 사람들의 평판이나 체면에 매우 민감한 사람이었음을 말해줍니다.
반면,다말은 담대하게 자기 운명을 개척하는 여인입니다. 시아버지 유다의 꼼수에 끌려들어가지만 않고 반론의 여지가 없는 증거물인 유다의 도장과 끈,지팡이를 제시함으로써 결국 승리자가 되었습니다. 자신의 체면과 안전만 추구하고,자기 아들들의 죄로 인하여 곤궁에 처한 며느리 다말의 정당한 권리를 무시하려 했던 유다의 이기적인 처신은 결국 자신을 수치 속에 빠뜨리고 말았습니다.
메시아를 준비시키시는 하나님
그런데 유다와 며느리 다말 사이의 스캔들 속에는 그들도 알지 못했던 엄청난 의미가 담겨있었습니다. 다말이 낳은 아기가 메시아의 계보를 이은 것입니다. 이 스토리의 마지막은 간결합니다. 다말이 쌍둥이를 낳는데 첫 아이의 이름이 베레스라는 것을 기록해주고 있습니다(38:27). 이 아이가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성취하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나오는 계보(마 1:6)의 한몫을 담당합니다.
마1:2-3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들을 낳고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고 헤스론은 람을 낳고”
마1:6 “이새는 다윗 왕을 낳으니라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마태복음을 바라보니 하나님께서 유다 집안을 그처럼 면밀하게 감찰 하신 이유가 납득됩니다. 하나님은 유다 지파를 메시아의 계보로 삼으시려 했던 것입니다. 믿음의 족장 야곱은 이 하나님의 섭리를 임종을 앞두고 열두 아들들을 향한 축복의 예언에서 밝혀주고 있습니다.
창49:8-10 “유다야 너는 네 형제의 찬송이 될지라 네 손이 네 원수의 목을 잡을 것이요 네 아버지의 아들들이 네 앞에 절하리로다 유다는 사자 새끼로다 내 아들아 너는 움킨 것을 찢고 올라갔도다 그가 엎드리고 웅크림이 수사자 같고 암사자 같으니 누가 그를 범할 수 있으랴 규가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통치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이르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
창세기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요셉의 이야기가 야곱 집안을 애굽으로 인도하여 들임으로 이스라엘 민족을 형성케 하는 섭리의 외적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면,37장과 39장 사이에 끼워 넣어진 이 이야기는 역사의 표면 아래서 인간들이 의식하지 못하는 가운데 진행되는 또 하나의 하나님의 계획,즉 메시아를 보내실 준비가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역사 표면의 사건사에만 주목하는 우리의 시선을 하나님의 구원역사의 가장 중요한 핵심인 메시아에게로 향하게 해즙니다. 그리고 메시아의 계보를 이루도록 선택된 인생들의 부족한 모습들을 통해 그리스도의 오심이 얼마나 자기를 낮추신 것이며,부족한 인생들과 얼마나 친밀한 사귐을 허락하셨는가를 깨닫게 됩니다
맺는 말
우리는 창세기의 막간에 주어진 이 스토리를 통하여 중요한 영적 원리를 깨닫게 됩니다. 그것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목적과 계획은 인간의 역량이나 세상의 조건에 구애받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삶과 또 이 시대 교회에 대한 평판이 아무리 허물이 많고 부족하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뜻하신 바가 그것 때문에 제한을 받지는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이 시대의 교회가 범하고 있는 죄악과 불충을 바라보면서 염려하고 좌절하고 낙망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통회와 탄식 속에서도,한편으로는 하나님의 권능과 경륜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통속하기 그지없는 우리의 삶도 거룩한 구원역사의 도구로 쓰실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많은 허물과 실책들에 대해 징계를 받을지라도 하나님이 우리 각 사람과 교회들에게 맡겨주신 사명을 바라보며 용기와 헌신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의 생각보다 크신 하나님께서 상처투성이의 더럽혀진 자라 할지라도 구원역사의 거룩한 도구로 사용하실 것입니다.